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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아카이브

근대 철학의 혁명: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

by 전킹스 2025. 9. 7.

중세 철학이 신학과 긴밀히 얽히며 신과 이성의 관계를 탐구했다면, 근대 철학은 인간 중심의 사유로 돌아왔다. 17세기와 18세기의 유럽은 과학혁명과 종교개혁, 정치적 변혁으로 급격히 변화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 수학과 물리학의 눈부신 발전, 종교 권위의 약화는 새로운 철학을 요구했다. 이제 철학은 신의 권위를 논증하는 대신, 인간이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고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를 중심 문제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두 흐름이 등장했다. 하나는 이성을 절대적 토대로 삼은 합리론, 다른 하나는 경험과 감각을 지식의 근원으로 본 경험론이다. 이 두 전통은 서로 대립했지만, 동시에 근대 철학을 풍성하게 만들었고, 결국 칸트에 의해 종합으로 나아갔다.

1. 근대 철학의 시대적 배경

16세기에서 17세기로 이어지는 시기는 흔히 근대의 문을 연 시기로 불린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갈릴레오의 실험, 뉴턴의 물리학은 자연 세계가 수학적 법칙에 따라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의 섭리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과 실험으로 진리를 탐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또한 종교개혁 이후 신앙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가 아닌 독립적 학문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합리론과 경험론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제시하려 했다.

2. 합리론: 이성을 통한 확실성

합리론은 인간 이성을 진리 탐구의 근본 토대로 본다. 합리론자들은 감각 경험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고 보았으며, 오직 이성적 사유만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 데카르트 – 방법적 회의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합리론의 출발점은 르네 데카르트(1596~1650)쳤다. 그는 『방법서설』에서 확실한 지식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적 회의를 제시했다. 감각도, 전통도, 수학적 진리조차 의심할 수 있지만, 의심하는 바로 그 순간 ‘의심하는 나’의 존재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나온 명제가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다.

데카르트는 이성을 통해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까지 논증하려 했다. 또한 물질세계를 기계적 법칙으로 설명하며 근대 과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합리론만 아니라 현대 철학 전체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2) 스피노자 – 범신론과 필연성의 철학

바뤼흐 스피노자(1632~1677)는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더 급진적인 철학을 전개했다. 그는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범신론을 주장했다. 그의 『윤리학』은 기하학적 논증 방식으로 전개되었으며, 세계의 모든 것은 필연적 법칙에 따라 전개된다고 보았다. 자유란 법칙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필연성을 이해하고 그것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당대에는 이단으로 여겨졌지만, 후대에는 인간 자유와 자연 이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었다.

(3) 라이프니츠 – 단자론과 조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1646~1716)는 ‘단자(monad)’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세계가 수많은 단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독립적이지만 신의 예정 조화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라이프니츠는 수학과 과학에도 큰 공헌을 했으며, 그의 철학은 합리론 전통의 정점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합리론자들은 모두 인간 이성을 신뢰했으며, 이성만이 보편적이고 확실한 지식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나친 이성 중심주의는 한계를 드러냈고, 이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경험론이 등장했다.

3. 경험론: 감각과 경험의 철학

경험론은 모든 지식이 감각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 빈 종이(tabula rasa)와 같으며, 경험을 통해 지식이 채워진다고 주장한다.

(1) 로크 – 경험에서 오는 지식

존 로크(1632~1704)는 『인간 자성론』에서 인간 정신은 태어날 때 백지와 같다고 했다. 그는 모든 관념이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경험은 감각 경험과 반성적 경험(마음의 작용에 대한 성찰)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들을 통해 인간은 지식을 형성한다. 로크는 또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며 정치철학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2) 버클리 – 존재란 지각되는 것이다

조지 버클리(1685~1753)는,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그는 물질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개념을 부정하고, 존재는 오직 인식 주체의 지각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관념론적 경험론으로 평가된다.

(3) 흄 – 회의주의와 경험의 한계

데이비드 흄(1711~1776)은 경험론을 가장 급진적으로 밀고 나간 철학자다. 그는 인간의 모든 지식은 인상과 관념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러나 인상들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은 필연적 인과가 아니라 단순한 습관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불이 물체를 태운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반복적으로 관찰했기 때문에 믿을 뿐, 필연적 법칙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흄의 회의주의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드러냈으며, 자연과학의 법칙조차 절대적 확실성으로 증명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비판은 이후 칸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4.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

합리론은 이성적 사유와 선험적 진리를 강조했고, 경험론은 감각과 경험을 지식의 근원으로 보았다. 이 둘은 방법론과 인식론에서 대립했지만, 공통으로 인간 지식의 근거를 탐구했다는 점에서 철학의 지평을 크게 확장했다.

합리론의 강점은 수학과 논리처럼 확실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이성 의존은 현실 경험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 경험론은 과학적 탐구와 밀접하게 연결되었지만, 흄이 보여주었듯 경험만으로는 인과와 필연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5. 근대 철학의 의의

근대 철학은 중세의 신 중심 사유에서 인간 중심 사유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합리론과 경험론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공통으로 지식의 확실성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가 동시에 드러났으며, 이는 곧 칸트의 비판 철학으로 이어졌다.

오늘날에도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은 여전히 의미 있다. 인공지능 연구에서 데이터(경험)의 중요성과 알고리즘(이성적 체계)의 관계, 과학적 법칙의 보편성과 경험적 관찰의 한계 등은 근대 철학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따라서 근대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공부가 아니라, 현대 사회와 과학, 윤리 문제를 성찰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