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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아카이브

현대 정치철학: 롤즈, 노직, 샌델

by 전킹스 2025. 9. 8.

20세기 후반 이후 정치철학은 개인의 자유, 사회적 정의, 공동체의 의미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장이 되었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 근대 홉스·로크·루소의 사회계약론, 칸트와 헤겔의 자유 철학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대 정치철학은 민주주의 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을 다뤄야 했다. 불평등, 복지, 다원주의, 개인의 권리, 공동체적 가치 등이 그 핵심 주제였다. 이러한 논의의 중심에 선 철학자가 존 롤스(John Rawls,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1938~2002),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1953~ )이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입장에서 자유와 정의, 권리와 공동체의 의미를 탐구하며 현대 정치철학의 지형을 형성했다.

1. 존 롤스: 정의로운과 공정성
(1) 『정의론』의 문제의식

룰즈는 1971년 출간한 『정의로운(A Theory of Justice)』을 통해 현대 정치철학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다. 그는 사회의 기본 구조를 정의롭게 조직할 원칙을 제시하고자 했으며, 그 기준으로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2)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

룰즈는 사회계약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사람들이 사회 제도를 설계한다고 가정할 때, 자기의 계급·인종·성별·재능을 모르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뒤에 선다고 상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면 누구도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할 수 없고, 모두가 공정한 원칙을 선택하게 된다.

(3) 정의의 두 원칙

룰즈는 이 상황에서 합의될 정도의 원칙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평등한 자유의 원칙: 모든 사람은 기본적 자유(언론, 양심, 결사의 자유 등)를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

차등의 원칙: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허용되지만, 그것이 사회의 가장 불리한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될 때만 정당화된다.

이 두 원칙은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려는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4) 영향

룰즈의 사상은 정치철학만 아니라 법학, 경제학, 사회정책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복지국가의 정당성, 사회적 약자 배려, 평등한 기회의 문제 등 현대 사회의 핵심 쟁점들이 그의 이론을 통해 재정의되었다.

2. 로버트 노직: 자유 지상주의와 최소국가
(1) 『무정부, 국가, 유토피아』

룰즈의 정의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하버드대 동료였던 로버트 노직의 『무정부, 국가,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 1974)』에서 제기되었다. 노직은 룰즈가 평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비판했다.

(2) 최소국가 이론

노직은 국가의 역할은 최소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국가는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는 기능만 수행해야 하며, 그 외의 복지정책이나 재분배는 정당하지 않다. 이를 최소국가(Minimal State)라 불렀다.

(3) 권리이론

노직은 재 분배적 정의 대신 권리이론(Entitlement Theory)을 제시했다. 정의란 어떤 패턴이나 결과를 강제로 맞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당한 절차를 통해 재산을 획득하고 이전하는 과정이 보장될 때 성립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금을 통한 강제적 재분배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로 본다.

(4) 영향

노직의 자유 지상주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과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개인의 자율성과 시장의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그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자유주의 진영에서 중요한 이론적 근거로 작용한다.

3. 마이클 샌델: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 비판
(1) 자유주의 비판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은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 1982)』에서 룰즈의 정의론을 비판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는 룰즈가 개인을 **탈맥락적 존재(unencumbered self)**고 가정한다고 비판했다. 즉, 무지의 베일 뒤에서 개인을 순수한 선택 주체로만 보는 것은 인간이 실제로 공동체·전통·가치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2) 공동체주의 정치철학

샌델은 인간은 공동체적 맥락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선에 대한 이해 역시 공동체적 가치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공정한 절차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공유하는 선의 개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3) 대중적 영향

샌델은 학문적 논문만 아니라,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 2009)』 같은 저서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강의는 하버드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 중 하나였으며,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4. 현대 정치철학의 쟁점과 의의

룰즈, 노직, 샌델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현대 정치철학의 핵심 논쟁을 형성했다.

룰즈는 공정성과 평등을 강조하며 복지국가와 민주주의의 철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노직은 자유와 권리를 최우선시하며 국가 권력을 최소화할 것을 주장했다.

샌델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공동체적 가치와 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들의 논의는 오늘날 복지와 시장, 개인과 공동체, 자유와 평등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5. 오늘날의 의미

오늘날 불평등 심화, 복지제도의 한계, 다문화 사회의 갈등, 민주주의 위기 같은 문제 속에서 룰즈·노직·샌델의 사상은 여전히 중요한 성찰의 지점을 제공한다. 복지 정책을 둘러싼 논쟁에는 룰즈의 차등의 원칙과 노직의 자유 지상주의가 충돌하고, 다원적 사회에서 공동체의 가치를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는 샌델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현대 정치철학은 이 세 가지 관점의 긴장과 대화를 통해 여전히 발전하고 있다.

결론

현대 정치철학은 룰즈·노직·샌델을 중심으로 자유, 평등, 공동체라는 세 가지 축을 둘러싼 논쟁을 전개해 왔다. 이들의 사상은 단순한 학문적 논의가 아니라,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가 직면한 핵심 문제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다. 철학은 여전히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