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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아카이브

과학과 기술철학: 하이데거, 엘륄, 라투르

by 전킹스 2025. 9. 8.

20세기 이후 철학은 과학과 기술의 급격한 발전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원자폭탄의 등장, 핵에너지, 정보기술, 인공지능 등은 인간의 삶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편했다. 과학은 단순히 지식을 생산하는 학문을 넘어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기술은 인간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힘으로 부상했다.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과 기술 철학(Philosophy of Technology)은 이러한 변화를 성찰하며, 과학과 기술이 인간과 세계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탐구하는 철학의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1. 하이데거: 기술과 존재 망각
(1) 기술에 대한 문제의식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기술에 대한 물음(Die Frag nah der Technik, 1954)』에서 기술을 단순히 인간의 도구로 보지 않았다. 그는 기술이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 곧 존재를 이해하는 하나의 형식(형이상학적 틀)이라고 분석했다.

(2) 기술과 ‘저 장소적 존재’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이 세계를 저장소(standing-reserve, Be stand)고 바라보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즉, 자연은 자원으로, 인간마저 에너지와 노동력으로 대상화된다. 이러한 기술적 세계관 속에서 존재의 본디 의미는 잊히고, 모든 것은 효율과 생산성의 관점으로만 평가된다.

(3) 위험과 구원의 가능성

하이데거는 기술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위험을 내포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존재 이해의 길을 열 수 있다고 보았다. 기술을 단순히 거부할 수는 없으나, 기술의 본질을 자각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할 때 우리는 존재와 세계를 새롭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2. 자크 엘륄: 기술적 사회의 도전
(1) 기술의 자율성

프랑스 철학자 자크 엘륄(Jacques Ellul, 1912~1994)은 『기술 사회(La Technique, 1954)』에서 현대 기술의 특징을 분석했다. 그는 기술이 단순히 인간의 목적에 종속되는 도구가 아니라, 자체의 논리와 발전 속도를 지닌다고 보았다. 기술은 가능성이 열리면 반드시 실현되는 경향을 가지며, 인간의 통제 밖에서 자율적으로 발전한다.

(2) 기술 결정론과 사회

엘륄은 현대 사회가 기술의 논리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정치, 경제, 문화 영역은 기술 발전의 요구에 맞추어 재편되고, 인간의 가치와 윤리는 종종 그 뒤로 밀려난다. 그는 이를 기술 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기수이라 불렀다.

(3) 인간과 자유

엘륄은 기술의 자율적 발전이 인간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기술을 무조건 거부할 수 없으며, 비판적 성찰과 사회적 규제를 통해 기술과 인간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브루노 라투르: 과학·기술·사회
(1) 과학사회학의 전환

프랑스 철학자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는 과학과 기술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We Have Never Been Modern, 1991)』와 『과학이 작동하는 방식(Laboratory Life, 1979, 공저)』에서 과학이 단순히 객관적 사실을 발견하는 활동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맥락과 긴밀히 얽혀 있다고 주장했다.

(2) 행위자-연결망 이론(ANT)

라투르의 대표적 개념은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이다. 그는 과학과 기술을 인간 주체만이 아니라, 기계·실험실·문서·자연물까지 포함한 네트워크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과학적 사실조차 연구자, 기계, 제도, 담론이 얽힌 연결망 속에서 구성된다.

(3) 근대성 비판

라투르는 근대가 자연과 사회, 사실과 가치, 인간과 비인간을 엄격히 분리한다고 보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이들이 얽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근대적 구분을 넘어, 복잡하게 얽힌 존재들의 네트워크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 과학과 기술 철학의 주요 쟁점
(1) 과학의 객관성

과학은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는가, 아니면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는가? 퀀트와 포피는 과학의 논리적 엄밀성을 강조했지만, 쿤과 라투르 이후 과학은 역사적·사회적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2) 기술의 가치 중립성 논쟁

기술은 가치 중립적 도구인가, 아니면 특정한 세계관과 권력관계를 내포하는가? 하이데거와 엘륄은 기술이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3)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라투르 이후 철학은 인간을 중심에 두는 사고에서 벗어나, 기술·자연·비인간적 존재와의 관계를 철학적 탐구 대상으로 확장했다. 이는 인류세(Anthropocene) 논의와도 연결된다.

5. 오늘날의 의미

오늘날 인공지능, 빅데이터, 유전자 편집, 기후 기술 등은 철학적·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하이데거의 기술 비판은 기술적 세계관 속에서 인간이 도구화되는 위험을 환기한다. 엘륄의 기술 자율성 논의는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정치와 사회의 현실을 설명한다.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 이론은 과학·기술·사회가 얽힌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용하다.

과학과 기술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사회 구조, 세계관을 형성하는 힘이다. 따라서 과학과 기술 철학은 현대 사회를 성찰하는 핵심 철학 분야로 자리매김한다.

결론

과학과 기술 철학은 20세기 이후 인간 문명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사유의 틀을 제공했다. 하이데거는 기술을 존재 망각의 징후로 분석했고, 엘륄은 기술의 자율성과 사회적 지배를 경고했으며, 라투르는 과학과 기술을 사회적 연결망 속에서 이해했다. 오늘날 기후 위기와 기술 혁신 시대에 이들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넘어, 인간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한다.